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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오후, 내 인생의 영웅으로

 (글 = 변상규 교수 대상관계 연구소 소장이며 한국성품학회 성품상담 전임
교수이다. 대전 침례 신ㅎ대학교 상담심리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어려서는 존경하는 사람도 많고, 위대한 사람도 많고, 초능력자도 보였다.
그들을 보며 나도 저 사람처럼 되어야지 생각하고 꿈을 키울 수 있어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 시절에는 존경할 만한 자기만의 영웅을 한두 사람 갖는
것은 심리적으로 건강하다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만화 속에서 어린 시절의 영웅들은 가장 많이 출몰했다. 아직 동영
상 애니메이션이 드물었을 때는 만화방에서 읽던 만화책 속에 영웅들이 등장
했고, 그러다가 로봇태권 v와 마루치 아라치를 만났으며 좀 더 커서는 슈퍼맨
같은 초능력자들과 만났다. 이 모든 영웅들의 특징은 모두가 악당들을 물리치
는 존재라는 점이었다. 악당에게 당하기도 하고, 패할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에는 통쾌하게 악당을 소탕하는 영웅으로 우리 앞에 우뚝 섰다. 우리는 그 영
웅들을 보며 권선징악을 배웠고, 그들처럼 힘센 영웅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슈퍼맨을 따라하다가 다리에 골절상을 입은 아이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우리들의 영웅이었던 ‘그들’

 심리학자 칼 융은 인생이 대략 80세까지라면 출생부터 40세까지를 인생의
‘오전’이라 보고, 40세 이후를 인생의 ‘오후’라 보았다. 인생의 오전에는 생
존을 위해 경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경쟁에서 승리하면 인생의 영웅이 된다.
 
인생의 오전을 살아가는 영웅은 힘이 필요하다. 그게 권력일 수 있고 실력일
수 있고 돈이거나 백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그런 힘을 이용하여 남을 이기고
제압하고 앞서나가 인생의 영웅이 되려고 한다. 그러나 나이 40세가 넘어서도
여전히 남을 의식하며 이기려하고 남을 이용해 승자가 되려는 사람은 (정신과
의사 칼 융에 의하면) 신경증 환장이다.
 
융 은 인생의 오전에 쓰이는 문법과 오후에 쓰이는 문법이 다르다고 했다. 인
생의 오전에는 남을 지배하고, 남을 쓰러뜨리고, 남을 짓밟으면서 영웅이 되
려고 하는 반면, 인생의 오후에는 남을 배려하고, 조금 손해도 볼 줄 알고,
 때로는 희생을 하면서 성취감보다 보람을 추구한다. 건강한 삶이란 이런 인생
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다. 융은 40세 이전에는 미운 사람도 많고, 복수하고
싶은 사람도 많지만, 40세 이후에는 그런 원수들을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안
에서 찾으라고 한다.
 
그게 바로 그림자, 곧 내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이다. 그림자를 만나 직면하
고 말을 건네고 화해하고 의식화하게 되면 밖의 원수가 사라진다고 보았다.
 안의 원수가 사라지니 밖의 원수도 힘을 잃는 것이다. 즉 40세 이후에는 눈을
외부가 아니라 내면으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내면으로 들어와 남이 아닌 나,
 눈치 보기보다 주체성을 갖고, 남을 이기고 지배하는 영웅이 아니라 자기 스
스로 자기 인생의 영웅이 되라는 것이다.
 
인생의 오전에는 투쟁하고 갈등하고 누군가와 싸우면서 이기려는 시기였다면
인생의 오후에는 화해하고 돌아보고 대화하면서, 보지 않으려고 했던 자기 내
면의 열등감, 또는 열등하다고 여긴 가치들을 재발견하는 시기이다. 그럼으로
써 우리는 자기의 삶을 자기의 문법, 자기의 방법대로 실현할 수 있으며, 이
것이야말로 그 어떤 성공이나 성취보다 중요하다. 비로소 우리는 자기 인생의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오후를 사는 문법

 자기 인생의 영웅이 된다는 의미는 우선 자기 삶에 여한(餘恨)을 없애는 일
이다. 성취해보고 싶은 것이라면 어떻게든 성취해보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
은 승화시키든지, 담담한 마음으로 단념하든지, 그것도 어려우면 꿩 대신 닭
이라고 상징적인 방법을 대체해서라도 극복해야 한다. 그리고 미운 사람과는
화해하고 그가 화해를 거부하면 나 스스로 화해하여 더 이상 미움의 짐을 지
지 않는 것이다. 평균 수명이 길어졌으나 죽음이라는 한계점을 염두에 두면서
그 한계지점에 이르기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
 
영웅도 건강이 부실하면 악당과 싸우지 못하니 기본적인 건강을 챙겨야 한
다. 술 담배나 해로운 모든 것은 일체 끓어버리고, 조금 먹고, 무얼 먹는 즐
거움보다 무얼 알아가는 정신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인류에게

대대로 큰 지혜를 준 여러 고전들을 접하면서 자신의 좁고 작은 아집을 반성
한 거울로 삼아보자. 그런 습관과 과정을 통해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을 죄
내려놓고 사람보다는 자연을 많이 접하면서 자연과 대화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래서 우리의 희로애락이 얼마나 부질없는 잠깐의 불꽃놀이였는지, 자존심
하나 지키려고 살아온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잠시 허무를 느끼되, 그러면서도
사랑하여 뜨거운 젊음을 떠올려 추억이라는 보상을 누려보자. 나는 그런 삶이
자기실현의 삶이요, 자기 인생의 영웅이 되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주
위에서 영웅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 인정하지 못하면 영웅이 될 수 없다, 인
생의 오후 어느 날, 스스로에게 ‘넌 내가 봐도 정말 영웅이야!’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자기 인생의 영웅이 된 사람이다. 세상 그 어느 영웅이
그런 당당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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